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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웃는 자들 - 농담꾼 - 조롱하는 자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아버지께 버림받아 고아가 된 그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막 15:35-36)

비극을 지켜보는 군중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사건의 유머나 불합리함을 보는 농담꾼, 혹은 기발한 비평을 하는 재치꾼, 혹은 냉소나 비꼬는 말을 하는 조롱꾼이 있기 마련이다.

어둠이 끝나자, 주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잘 들어봐라. 그가 엘리를 부른다 - 그가 엘리야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거리로 삼았다. ‘자칭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예언한 선지자에게 와서 구해달라고 부르고 있네! 엘리와 엘리야라는 단어를 갖고서 말장난 한 번 잘하는군!’

하지만 십자가 처형은 유머나 위트에 어울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대우 중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잔인한 장면을 보고 비웃었을까?

요한복음 7장 1-9절에서 우리는 초막절을 바로 앞두고 일어났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초막절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지켜지는 축제였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그 절기에 올라가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로서의 자격을 공적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행한 기적을 추종자들로 보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들이 믿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을 믿겠는가?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이 대가족의 관계 속에서 홀로 완전한 분이시며, 또한 부패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홀로 거짓 없는 사람이라는 기적에는 눈이 멀어 있었다. 불신은 큰 문제이다. 대개 불신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유다서 18절에서 예수님의 가장 어린 동생인 유다는, 기롱(조롱)하는 자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경건치 않은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조롱을 쏟아 붓는다. 그들의 태도와 선택은 이생의 정욕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유다의 태도는 크게 변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을 거절하며,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에 온갖 종류의 반대를 한다.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그 날에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되고, 모든 혀가 그분을 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떤 무릎들은 엎드려 절하며 떨게 될 것이다. 어떤 얼굴들은 수치심으로 가득 차고 당혹감으로 붉어져서 갈보리의 그 사람, 이제는 영광 중에 계신 그 사람을 공경하기 위해 엎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에는 농담하던 혀, 재치 있던 유머, 조롱하던 입은 잠잠해질 것이다. 여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내내 반항하고 그를 거부하며 자신의 정욕을 따르기를 원하던 그 무수한 사람들이 그 날에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간절히 구원하고자 하셨던, 그리고 우리를 향한 간절한 갈망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던 갈보리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워하시까지 사랑하시며, 우리를 얻으시기까지 그리워하시네.

그러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가 우리를 갈망하여 죽으셨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이제 저 위에서 그분과 함께 하길

간절히 바라신다네.

파버(F.W. Faber)

8. 한 사람의 투박한 친절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막 15:36)

이 친절한 행동은 아마도 처형을 수행했던 군병 중 한 사람이 했을 것이다. 군병들은 대개 신 포도주 병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으로 행군을 할 때나 힘든 임무를 수행할 때 갈증을 해소했다. 그 군병은 요한이 기록한 대로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부르짖으시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했다. 예수께서 유일하게 자신의 육체적 불편함에 대해 언급하셨던 순간이었다. 이 갈증은 그분의 마음속에 감춰있던 갈망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이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을 믿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갈망 말이다.

전날 밤 유월절 만찬 이후 예수님이 무엇을 먹거나 마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분은 다섯 번의 재판에 끌려 다녔고, 한 번은 헤롯의 궁에서 조롱을 당하셨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채찍에 맞으셨다. 때로 죄수가 채찍질에 의해 죽기도 했을 만큼 너무 가혹해서 작은 십자가형이라고도 불렀던 그 채찍에 말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곳으로 끌려가셨고, 그곳에서 발가벗겨진 채 고통 속에서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누군가 예수님에게 진통제 음료를 주었지만 그분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어떤 음식이나 음료를 받으신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친절을 베푼 후, 그 군병은 거기에 서 있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예수님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았다.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고 말했다. 몇 분 후에 예수님은 죽으셨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믿음의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나는 그 후에 그가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또 그것이 자기 죄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과연 깨달았을지 의문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죽음 건너편에 있을 때에 우리 영혼 깊은 곳의 목마름을 갖고 예수께로 나아온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수를 선물로 주실 것이다. 하지만 무덤의 저편에서 생명수를 한 모금 요청하는 것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서 가르치셨다.

이제 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서 아이작 와츠(Isaac Watts)와 함께 찬송을 불러보자.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찬송가 141장)

번역/ 김 화 령(남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