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족과 은혜를 함께 나누던 성도들과 이별하고 조국을 떠나 이곳 호주 시드니에 정착한 지도 벌써 9년이 지나고 있다.

필자 생애에 외국생활이란 꿈이나 상상에서나 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참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마치 이미 자랄 대로 자란 장성한 나무를 옮겨놓은 듯, 아직도 여전히 어색하고 힘겹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벌써 쓰러지고 말았을 지난 시간이었다. 매 순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그 사랑에 힘입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음을 고백 드린다.

해마다 새롭게 만나는 많은 청년 유학생들,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상한 심령으로 지친 교민들을 대하면서 그들 마음에 작으나마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 흔적이 새겨지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마음은 갈수록 더 커진다.

이 글을 통해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역사하셨던 일들을 함께 나누기 원한다.

호주 이민자 - 그들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이민을 꿈꾼다. 그만큼 삶이 고달프고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이 크다는 얘기이다. 3, 40대 한국인 절반 이상이 이민을 생각한다는 통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민이 고달픈 삶에서 최선의 탈출구일까?

호주 한인이민역사는 대략 40여 년인데, 대체로 베트남 전쟁 이후 군인, 군무원들과 그 가족 중에 한국행을 포기한 상당수가 호주 이민의 본격적인 물꼬를 틀었다고 본다. 1960년대와 70년대 암울했던 한국의 정치, 경제상황 속에서 과감하게 박차고 나온 개척자들인 셈이다. 초기엔 주로 노무자 중심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이후 국외개방 물결을 따라 이민자가 급증했으며 지금은 주로 사업투자와 유학생 중심의 고급인력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인 셋이 모이면 식당을 차리고 일본인 셋이 모이면 회사를 차리고 한국인 셋이 모이면 교회를 차린다.”라는 말은 어쩌면 호주를 두고 한 말인 냥 이곳 상황을 잘 나타낸다. 또한, 한국인의 정서와 종교적 열정이 남다름을 증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민을 결심한 계기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여유로운 삶의 동경과 한국의 지나친 교육열에 대한 반발심, 영어공부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도피 등이다. 이러한 이민역사에 걸맞게 이곳저곳에서 소위 성공한 교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정치인, 학자, 사업가 등으로 호주 주류사회 진입은 확실히 타민족보다 빠르고 안정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의 삶은 겉보기와는 판이하게 달라.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진하듯이 나름대로 많은 문제가 산재했다. 여유로운 삶을 찾아왔으나 높은 세금과 고물가로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부가 함께 온갖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고 자식만큼은 번듯한 직업을 갖게 하겠다는 생각에 한국 뺨치는 학원 열기, 일이 년만 고생하면 그 지겨운 영어에서 해방될 거란 막연한 기대로 들어왔다가 오히려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한 채 귀국하는 학생들, 같은 한국인 사업자끼리 서로 물고 물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

그러나 어쨌든 그들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안에서 조국을 떠난 귀중한 영혼이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처럼, 조국을 떠나온 모든 이민자는 (죄와 사탄에) “사로잡힌 네 민족(your countrymen in exile)”이다.

소위, 선진국의 화려하고 요란한 겉모습이야 어떠하든지 그들은 죄의 노예들이요 평생을 사탄에게 매어 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어딘들 낙원일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심령 누군들 어찌 부유할 수 있겠는가!

호주는 알려진 대로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선진국인데 한때 불타는 전도 열정으로 온 세계를 누볐던 영국인의 후예들이 사는 나라로 조상의 신앙과 헌신 위에 서 있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음은 여느 국가와 다를 바 없다. 이를 통해 한국 성도들이 흔히 말하는 선진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바란다.

세상 사람이야 번듯한 겉모습에 현혹된다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시선으로 그 내면을 봐야 한다.

“왜 이민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민, 유학생을 위한 교회 - 저수지의 유혹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복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은 이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던 말이다. 당연히 “아멘”이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기를 힘쓰지 않음은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을 배반함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함정이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물론 성도의 교제와 하나님 말씀을 배움, 그리고 서로 사랑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님 계획은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뒤늦은(?) 발견은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교회는 “흩어지려고 모이는 곳”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하던 아쉬움, 전도하고 양육해 놓으면 귀국해버리는 야속한(?) 청년들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는 “저수지의 유혹”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지어 헌신된 성도의 마음에도 이런 “저수지의 유혹”이 있을 것이다. 모두 우리 교회에 붙잡아두고 싶고, 다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고, 천년만년 함께 알콩달콩…

그러나 이러한 유혹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거의 이천 년이 지나서야 한반도에 들어오게 한 원인은 아닌지! 한 전도자는 이런 말을 했는데, 참으로 가슴 저미게 하는 말이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 사망소식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예수님의 돌아가심은 이천 년이 지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선교집회에서 들었던 원주민의 간증을 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제 오셨습니까? 이런 소식도 모르고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은 어쩌라고요?”

  지금까지 다양한 계기로 만나 교제하고 복음을 전한 분이 거의 이백 명이 넘음을 생각할 때 그동안 이 끈질긴 “저수지의 유혹”에 얼마나 지독하게 얽매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인식하고 기도제목으로 삼는 한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시고 다듬으시리라 믿는다.

저수지가 아니라 통로로

지난해 십이월 말, 그동안 짧게는 육 개월, 길게는 삼 년을 함께 교제하던 많은 분을 떠나보내야 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 익숙해져 초연할 만한데도 사랑하는 분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이곳에서 경험하고 배운 주님과 모든 교훈이 더 할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타나시며 그들의 모든 언행 심사를 통해 이웃이 주님 향기를 느낄 수만 있다면…

최근 한 청년을 만나 전도했는데 그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 또한, 그 동안의 모든 피로나 문제들에서 자유를 누리는 감격을 맛보았다. 성도들 삶에서 때론 상담도 필요하고 정신적인 위로도 필요하겠지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역시 “복음” 안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가끔 유학생 중에 이민으로 정착할 계획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로 받지만, 대개는 1-2년 정도만 허락된다. 그래서 이젠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단순히 “돌아간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선교사로 “파송한다.”라는 마음으로 대하기로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민자교회로서 할 일이 많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우선 그들에게 분명한 복음 확신을 심는 일을 시작으로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예배하는 삶, 기도 배우기, 성도들과의 풍성한 교제, 주변의 불신자들을 향해 입을 열어 복음 전하기, 그리고 귀국 후에 각 지역교회 지체로서 충성스러운 성도로 더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울러 여전히 복음을 거절하고 끝까지 피하는 영혼이라도 우리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맡아, 훗날 그 영혼이 곤고하고 답답하여 절대자를 찾을 때 여기서 받았던 하늘 위로, 성도들과 교회를 통해 느꼈던 사랑이 주님께 나오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처음엔 좁게 시작될지라도 거대한 크기로 커져 모든 것을 능히 운반하는 주님의 통로로 계속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주님! 저희를 주님 사랑의 통로, 은혜의 통로로 기꺼이 사용하시옵소서.”

이 강 일(호주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