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는 세월이 더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새 봄이 가더니 무더운 여름입니다. 특히, 여름은 휴가철인지라 믿는 분들은 캠프나 수양회를 하려고 바닷가나 맑은 물이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숲과 강,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 있노라면 ‘여기가 좋구나!’ 하며 더 머물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이내 돌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사물을 감상하고 때로는 황홀감을 느끼면서 쉽게 욕심이 생기고 온갖 유혹을 받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제자들이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를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이 달아올라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막 9:5) 하며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변하고 삶이 결정됩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현란한 가상 문화권에서 혼란스러워합니까? 이는 마치 물고기가 가짜 낚싯밥을 물었다가 끌려 나가는 꼴입니다. 차라리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복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특히,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통합으로 새롭게 열린 뉴미디어 시대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얼마나 우리 마음이 보는 것에 지배를 받게 하는지요? 특히, 어린이들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뉴미디어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는 세상의 현란한 물질세계는 우리의 영적 시야를 가로막는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되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머리와 입으로는 주님 나라를 알고 말하면서도 진정 사모하는 마음이 적을까요? 이것은 가상의 미디어에 속아 현실감을 상실한 것처럼 이미 이 세상과 현실을 하늘나라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육적 마음의 판단에 이끌린 일종의 중독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라는 권면에 귀 기울여야합니다.(*근신하라: 중독을 피하라는 의미도 됨)

기원전 605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어갔고 이스라엘은 그 후에 두 차례 더 항거했으나 결국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칠십 년간 포로생활을 하며 잃어버린 나라, 떠나온 고향,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며 그야말로 이방 나라에서 서글픈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떠나온 본향을 사모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발길을 옮겼지만,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이방 나라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곳 문화와 삶에 동화되어 살다보니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삶의 태도가 혹 이런 모습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쌓아 놓은 것이 많고 뿌려놓은 씨앗이 많아서 마음과 생각이 온통 점령당해 지금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범상치가 않습니다. 언제 은혜의 때가 마감될지 모르는 긴박감이 날로 더해갑니다. 세계의 경제 블록화나 세계 경제의 격변과 요동, 기상이변 속출, 인간의 지적발달에 의한 바벨탑 도전,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요한계시록이나 베드로후서에 언급된 큰 환란의 조짐이 감지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난 1990년대의 극단적인 재림주의자들을 통해 일종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장림 목사는 곧 휴거될 거라며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에게 날짜까지 알려주며 준비시키고는 정작 자기는 거액의 돈을 침대 밑에 숨겨두어 수사관들에 의해 적발되는 실소를 금치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물 타기하는 세력들이 많지만, 성경의 예언은 빗나간 것이 없습니다. “누구도 그날과 시간은 알 수 없다.”(막 13:32)라고 말씀하셨지만, 오시리라는 약속은 유효하며 조만간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태도로 이 땅에 말뚝을 더욱 깊이 박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만일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마음이 우리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하실까요?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여기가 아무리 좋다한들 얼마나 머물 수 있을까요? 또 떠날 때에는 얼마나 가지고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구원받기 전에는 모든 것의 외적인 면만 보고 중요하게 여겼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이 말씀은 그가 주님을 육체대로 보았다가 실패하고 실수한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뵙기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적대시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안목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구주로 믿게 되고 영혼들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안목도 새로워지기 원합니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육체가 아닌 영혼을, 세상의 화려함이나 포장된 허상이 아닌 주님께서 건축 중이신 참 교회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닌, 아름다운 발을 주목하는 눈을 가지고 싶습니다.

장차 망할 세상에 기대를 거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장차 도래할 영원한 주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점점 각인되기를 소원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

글: 전재유(춘천교회)